오즈죠 성터

오즈죠 문화재

오즈죠 연혁

오즈죠는 히지카와 강 주변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세워진 평산성으로, 뒤에 흐르는 히지카와 강을 천연의 해자로 이용하고, 남쪽을 향해 니노마루와 산노마루를 배치하여, 내해자와 외해자로 에워싼 제곽식의 성곽입니다. 별칭으로 지장 산성, 거북이 성이라고도 불립니다.
오즈죠의 축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중세 무렵 오즈 지방의 영주였던 시모츠케 국(토치기 현) 출신의 우츠노미야 씨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코쿠를 평정한 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히데요시의 충복 무사 토다 카츠타카, 축성의 명수 토도 타카토라, 시츠가타케 전투 칠본창(맹활약한 일곱 무사) 중 한명인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어서 입성하였으나, 근세 성곽으로 본격적으로 정비된 것은 토도・와키자카 시대로 추정됩니다. 겐나 3년(1617년), 카토 사다야스가 호키 국(톳토리 현) 요나고로부터 입성한 이후, 메이지 2년(1869년)의 판적봉환(영주 통치령의 국가 환수)이 있기까지 오즈 한 카토 가문 6만섬의 거성이 되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 18 채나 있던 망루가 차례로 없어지고 메이지 21년(1888년)에는 천수각까지 철거되었지만, 헤이세이 16년(2004년)에 4층 4계의 천수각이 목조로 복원되었습니다.

겐로쿠 5년(1692년) 오즈죠 그림 지도

겐로쿠 5년(1692년) 오즈죠 그림 지도

혼마루의 볼거리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 코란(난간) 망루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 코란(난간) 망루

지정일:쇼와 32년(1957년) 6월 18일

혼마루의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와타리 망루로 북쪽의 천수각과 이어져 있습니다.
안세이 4년(1857년)에 대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으나 3년 후인 만엔 원년(1860년)에 재건되었습니다. 그 때 외벽이 시타미이타바리(판자벽)에서 싯쿠이(석회벽)로 변경된 것으로 보입니다. 높은 층 지붕에는 당파풍 처마, 남서쪽 모퉁이에는 하카마 모양의 낙석 장치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창 바깥으로 나오기 위한 마와리엔(툇마루)에 의보주가 붙은 난간이 있다는 점입니다. 망루에 이러한 난간을 설치하는 것은 아주 보기 드문 경우로 천수각 다음 가는 격식 높은 망루로 여겨집니다.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 다이도코로(부엌) 망루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 다이도코로(부엌) 망루

지정일:쇼와 32년(1957년) 6월 18일

오즈죠에 현존하는 4채의 망루 중 가장 큰 건물이며 와타리 망루로 천수각과 이어져 있습니다. 천수각에 버금가는 규모로 ‘소 천수각’이라 할 만큼 위용있는 모습입니다.
에도 시대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안세이 4년(1857년)의 대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어 2년 후에 재건되었습니다. 부엌의 기능을 겸비한 보기 드문 건물입니다. 농성시에는 병사를 위한 부엌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1층의 3분의 1이 흙마루이며 배연용 격자창 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2층 북측에 있는 천조파풍(삼각형 모양) 지붕의 중앙에는 화두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1쿠라가리(비밀통로) 문 터
  • 2혼마루 우물

台所櫓 高欄櫓

니노마루의 볼거리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 오와타야구라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 오와타야구라

지정일:쇼와 32년(1957년) 6월 18일

니노마루의 동쪽 모퉁이에 독립해 있는 망루로, 히지카와 강에 접해 있어 강의 상하류를 샅샅이 살필 수 있는 요지로서 성 동쪽의 방어를 맡았습니다.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텐포 14년(1843년)에 재건되었습니다. 외부 모퉁이에는 하카마(주름치마 모양의 일본 전통의상) 모양의 낙석 장치를 달았으며, 그 일부를 격자창으로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잦은 홍수 피해로 훼손이 심하여, 쇼와 34년(1959년)에 해체 수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지반의 돌담을 약 2.6m 높였습니다.

에히메 현 지정문화재 시모다이도코로

에히메 현 지정문화재 시모다이도코로

지정일: 쇼와 43년(1968년) 3월 8일

맞배지붕에 혼가와라부키(평기와와 둥근기와를 맞물려 끼워넣음) 방식을 택한 창고형 건축물로, 내부는 일부가 2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오즈죠 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창고 건축물입니다.
건물 외부는 뒤쪽까지 석회칠이 되어있으며, 성 내의 식량고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메이지 이후는 감옥, 제사 공장의 창고 등으로 이용되었습니다.

  • 3천수각 주춧돌(이설)
  • 4망루 밑 문 터

오와타야구라 시모다이도코로 내해자

산노마루의 볼거리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 산노마루 남쪽모퉁이 망루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 산노마루 남쪽모퉁이 망루

지정일:쇼와 32년(1957년) 6월 18일

산노마루의 외해자 남쪽 모퉁이에 위치하며 현존하는 오즈죠 망루 중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쿄호 7년(1722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44년 후인 메이와 3년(1766년)에 재건하였습니다. 중요한 곳에는 솔송나무를 사용하고 기둥에는 소나무를 사용하였으나, 한의 재정난 때문에 공사에 관리들이 동원되는 등 비용 절감을 위해 힘썼던 사실을 무나후다(현판)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내부는 타이코 벽(벽을 두껍게 한 부분)에 대나무관을 안에 넣고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흙벽으로 덮은 좁은 틈인 카쿠시자마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 5산노마루 북서쪽 모퉁이 망루 터
  • 6서문 터

외해자 내해자

오즈죠 주변 문화재

  • 에히메 현 지정 사적

    나카에 토주의 저택 터(시토쿠도)

    나카에 토주의 저택 터(시토쿠도)

    오미 국(시가 현)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양명학의 시조로 알려진 나카에 토주는 카토 가문의 신하였던 조부와 함께 10세 때 요나고에서 오즈로 왔습니다. 27세에 오즈를 떠나 오미로 귀향하였으나, 그 후로도 많은 오즈 한시(영주 휘하 무사)가 토주의 가르침을 받아 오즈 한(영주 통치령)에 학문을 중시하는 기풍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지토쿠도(지덕당)는 오즈에 살았던 100섬 녹봉 무사의 가옥을 본떠서 토주 저택 터에 세운 서원으로 지금은 오즈 고등학교 안에 있습니다. 토주와 공자의 목조가 안치되어 있으며, ‘나카에의 물’이라 불리는 오래된 우물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 오즈 시 지정

    카토 미츠야스 영묘와오즈 한슈(영주) 카토 가문 묘소(료고잔 소케이인)

    카토 미츠야스 영묘와오즈 한슈(영주) 카토 가문 묘소(료고잔 소케이인)

    오즈 한 초대 한슈 카토 사다야스가 아버지인 미츠야스(소케이인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하였고, 이후 역대 한슈의 보제를 기원하는 절이 되었으며 임제종묘심사파의 말사입니다. 창건 당시는 시즈키야마 소케이인이라 불렀으나, 텐메이 4년(1784년)에 료고잔 소케이인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경내에는 한의 선조 미츠야스, 초대 사다야스, 6대 야스미치, 8대 야스유키, 10대 야스즈미, 11대 야스모토, 13대 야스아키의 묘소가 있습니다.

  • 오즈 시 지정

    시젠쇼인메이린도(지선서원 명륜당) 터

    시젠쇼인메이린도(지선서원 명륜당) 터

    이요 지역 8개 한 중에 최초로 한이 설립한 학교인 ‘시젠쇼인메이린도’는, 나카에 토주의 백회기인 엔쿄 4년(1747년)에 창설되었습니다. 한슈의 죽음과 재정난으로, 계획 후 3년 후에야 완성되었습니다. 무사 계급 이상의 자제를 교육하는 장으로, 양명학자 카와다 유킨도 지도에 힘썼습니다. 메이지 5년(1872년)의 학제 발포에 의해 폐지되었으나, 유일하게 남아있는 도조(흙벽 석회 건물)가 한이 설립한 학교의 역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 국가등록 유형문화재

    구 카토 가문 주택 본채

    구 카토 가문 주택 본채

    이 목조 2층 주택은 타이쇼 14년(1925년)에 구 한슈의 자손인 카토 야스미치 씨가 세운 것입니다. 2층의 세 방향을 덧문 대신 ‘유리 장지’라 불리는 유리창으로 만든 개방적인 모습이 특징입니다. 그 외에도 곳곳에서 구 영주 가문다운 높은 격식을 느낄 수 있으며, 영화 「남자는 괴로워」의 촬영지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부지는 ‘오토노사마 공원’으로 정비되었고, 병설 시설인 ‘매장 문화재 센터’에는 오즈죠 성터에서 출토된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즈 시내에서 오즈죠 가는 길

오즈 시내에서 오즈죠 가는 길

오즈죠 주변 안내도